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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세계

언어 속의 성차별: ‘그녀’를 위한 언어의 변화

언어 속의 성차별: ‘그녀’를 위한 언어의 변화

언어의 세계.3-언어와 성차별


1. 언어는 사회 구조를 반영한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조직하는 방식이며, 사회 안에서 어떤 존재가 ‘주체’이고 어떤 존재가 ‘대상’인지를 은밀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규정한다. 예컨대 한국어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인 “여교사”, “여배우”, “여군”은 남성이 그 직업의 기본값이라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남성은 ‘교사’, ‘배우’, ‘군인’이라 말할 때 성별을 언급하지 않아도 되지만, 여성을 지칭할 때는 반드시 성별을 붙여야만 ‘정체성’이 성립한다. 이는 언어가 무심코 여성을 **‘파생된 존재’, ‘예외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언어적 습관은 성별 권력의 비대칭성을 고정하고 재생산하는 강력한 장치다.

2. 성중립 언어의 필요성과 국제적 흐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세계 각국은 **성중립 언어(Gender-neutral language)**의 도입을 통해, 언어가 갖는 성차별적 구조를 해체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스웨덴은 2015년, 기존에 존재하던 남성 대명사 han과 여성 대명사 hon 외에 성중립 대명사 hen을 사전에 공식 등재하였다. hen은 성별을 특정하지 않거나, 논바이너리(non-binary) 성 정체성을 지닌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되며, 유치원 교육부터 공공기관 문서까지 실제 사용이 확산되고 있다. 영어권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진다. 과거에는 'fireman(소방관)', 'policeman(경찰)' 등 직업명 자체에 성별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firefighter', 'police officer'와 같은 중성적인 명칭이 더 널리 쓰인다. 대학 교과서, 정부 문서, 방송 언어에서도 이 용어들이 표준이 되고 있다.

프랑스어, 독일어 등 성별 문법이 내재된 언어권에서는 이 변화가 더 복잡하게 이루어진다. 독일에서는 ‘학생’을 뜻하는 ‘Student(남성형)’ 대신 중성 표현인 'Studierende'를 사용하고, 프랑스에서는 여성형 직업 명칭을 병기하거나 *(e)*를 통해 양성 언급을 병렬화한다. 예: professeur(e). 이러한 변화는 단지 단어 수준의 수정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에 깃든 **성별 중심성(Bias toward male norm)**을 해체하고자 하는 구조적 시도다. 특히 젠더퀴어,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성중립 언어의 확산이 존재의 가시성을 높이고, 언어적 권리를 보장하는 실질적 수단이 된다. 결국 성중립 언어는 단순한 말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 권리, 존중의 문제이자, 사회가 어떻게 ‘사람’을 정의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선언이다.

3. 한국 사회에서의 성차별 언어 사례와 비판

한국어는 높임법, 격식체, 주체 높임과 객체 높임 등 사회적 위계가 언어 구조에 녹아든 특수한 언어 체계를 갖고 있다. 이 속에서 여성을 규정짓는 방식은 언뜻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관습적인 편견과 역할 고정이 매우 깊게 작동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뉴스 기사나 방송 자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모의 여검사”, “육아하는 여의사”, “워킹맘 CEO” 등의 표현은 여성의 전문성을 성별이나 사적 역할로 ‘덧씌우는’ 방식으로 언어가 작동함을 보여준다. 반면 남성에 대해서는 “훈훈한 외모의 남의사”, “육아하는 남검사”라는 표현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는 여성은 직업적 정체성 이전에 외모나 가정 내 역할로 먼저 평가되고, 남성은 공적 주체로 여겨지는 담론의 불균형을 언어가 강화한다는 증거다.

또한 일상 속 무심코 쓰이는 말들도 문제다. “여자가 감히”, “여자가 무슨…” 같은 표현은 언어를 통해 직접적인 권력 배제를 수행하는 구조다. 더 나아가 “여성스럽다”는 말은 한편으로는 온화함이나 배려를 뜻하지만, 동시에 리더십이나 능력, 주체성의 결핍을 연상하게 만드는 문화적 맥락을 품고 있다. 이와 같은 언어적 코드들은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은연중의 지침이 되며, 여성 스스로도 자신의 언어 사용을 조심하거나 위축되게 만드는 **‘자기검열의 메커니즘’**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결과, 사회는 여전히 남성 중심의 언어 구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여성은 ‘예외적 존재’, ‘두 번째 주체’로 남게 된다. 이처럼 한국어는 단어의 의미를 넘어서 문법, 어휘 선택, 담화 구조 전반에 걸쳐 성차별을 반영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4. ‘그녀’를 위한 언어는 가능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단지 단어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정한 변화는 ‘여성다움’을 언어로 규정하려는 시도 자체를 해체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예컨대 ‘걸크러시’라는 말조차 여성의 강함을 여성 내부에서조차 예외적인 성질로 분리하고 있으며, “남자처럼 강하다”는 표현은 여전히 ‘강함 = 남성성’이라는 인식을 고수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여성적 언어’의 창조가 아니라, 기존 언어 구조 속의 젠더 편향을 통째로 다시 쓰는 일이다. 최근 일부 여성 작가들과 언어학자들은 여성 주어를 기본값으로 쓰는 실험적 글쓰기, 혹은 ‘그녀가 말한다’로 시작하는 여성 중심 서사를 통해 이 흐름을 이끌고 있다. 이는 단지 페미니즘적 운동을 넘어서, 언어의 미래를 다시 상상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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