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세계.46-시니어 언어 정치학
1. 호칭 하나가 만든 거리감
“틀딱”, “노망”, “늙은이”… 우리는 일상 속에서 나이든 사람들을 부르는 말에 얼마나 무심했을까. 최근 몇 년 사이 청년 세대 사이에서 흔하게 쓰이는 ‘틀딱’이라는 표현은 ‘틀니 낀 딱딱한 사람’이라는 조어에서 유래된, 매우 비하적인 단어다. 주로 인터넷 커뮤니티나 댓글 등지에서 퍼졌고, 특정 행동을 일반화하여 ‘노인 전체’를 조롱하는 데 사용되었다. 단순히 웃기자고 쓰는 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표현에는 나이 든 사람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태도가 스며 있다. 언어는 사회적 태도를 반영하고 또 생산한다. '틀딱'이라는 말 한마디에는 노인을 향한 무시, 세대 간 단절, 감정적 분노 등이 모두 얽혀 있다. 이 단어를 쓰는 순간 우리는 이미 노인을 나와 다른 존재, 즉 ‘우리 아닌 그들’로 분리하고 있는 셈이다. 호칭은 단순한 이름이 아닌, 그 사람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과 권력관계를 포함한 장치다.
2. 단어는 사회적 상상력을 만든다
‘노인’이라는 단어는 공식 문서나 제도상으로는 중립적일지 몰라도, 일상에서는 그렇지 않다. 어떤 이에게는 존중의 의미일 수 있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낡았다', '퇴물 같다'는 이미지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실버 세대’, ‘장년층’, ‘어르신’, ‘시니어’ 같은 대체어들을 사용해왔다. ‘어르신’은 존대의 의미를 내포하지만 과잉 예우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시니어’는 마케팅적으로 세련되지만 때로는 현실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뉘앙스를 갖는다. 결국 단어를 바꾼다고 의미가 바뀌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 단어에 붙는 사회적 상상력이다. 예컨대, '실버 세대'는 활동적이고 문화적 소비를 하는 계층으로 그려질 수 있지만, 그 뒤에 실제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노년층은 지워질 수 있다. 단어는 특정 집단을 단순히 지칭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3. 혐오 표현의 시대, 언어가 더 예민해진다
오늘날 ‘틀딱’ 같은 혐오 표현이 퍼지게 된 이유는 단지 인터넷 유머 문화 때문만은 아니다. 그 밑바탕에는 세대 간 갈등, 사회적 자원 분배, 정치적 분열이 자리하고 있다. 청년층은 고용과 주거, 복지 측면에서 구조적인 박탈감을 겪는 반면, 노년층은 상대적으로 기득권으로 인식되며 ‘사회적 비용’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이 ‘노인 일반’을 향한 적대감으로 이어지고, 혐오 표현이라는 언어 형태로 분출되는 것이다. 이 현상은 ‘나이차별주의(ageism)’와도 연결된다. 노인을 무능력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로 보는 인식이 일반화되면, 혐오 표현은 더욱 정당화된다.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나 유튜브 댓글, 뉴스 기사 반응 등에서 확인되는 이런 표현들은 사회 전반에 언어적 감수성 저하를 가져온다. 결국 ‘틀딱’이라는 단어는 단지 단어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이 유통되는 구조와 맥락 전체를 반영하고 있다.
4. 존중하는 언어는 시대의 문화 수준이다
언어는 단지 전달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문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다. '틀딱'이라는 말이 웃기다고 느껴지는 사회는 누군가를 조롱함으로써 웃음을 만든다는 점에서, 그만큼 타인을 대상화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문화를 드러낸다. 존중하는 언어는 단지 예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존재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확인시켜주는 언어적 행위다. 해외에서는 'senior citizen', 'elder', 'older adult' 등 나이든 사람을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이 있으며, 각국의 문화적 태도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된다. 한국 사회도 이제 단순히 ‘시니어’라는 단어 하나로 포장하기보다는, 그 단어에 담긴 존중, 배려, 실질적 정책적 태도까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노인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는, 결국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에 대한 언어적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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